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시아 전쟁 (문단 편집) === 이후의 전쟁과 페르시아의 반응 (BC 478 ~ BC 449) === 페르시아의 침공이 끝난 뒤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를 몰아낸 여세를 타고 세력 확장을 꾀했으며, '''이오니아 일대를 포함한 에게해 전체를 넘어서 헬레스폰토스와 흑해, 키프로스와 이집트까지''' 세력확대를 꾀했다. 또한 이러한 활동에 스파르타가 소극적으로 움직인 반면[* 왜냐면 스파르타는 노예계급인 헤일로타이의 반란 때문에 장기원정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적극적으로 세력 확대를 꾀해 BC 478~BC 477년 사이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주도하게 되었다. 에게 해 북부의 마지막 페르시아 기지였던 에이온을 BC 476년에 함락시켰고, BC 466년에는 대규모 델로스 동맹군을 소아시아지역으로 파견해 이오니아 지역을 모두 점령한다. 이집트는 BC 459년과 BC 454년에 아테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키나 페르시아에 진압당했고, 키프로스 역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치열한 쟁탈전이 펼쳐졌다. 결국 지친 양국은 BC 449년에 칼리아스 화약을 맺어 전쟁을 끝낸다. 단순히 이렇게만 보면 꽤나 열심히 치고받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페르시아는 '''고질적인 왕위다툼에 신경쓰느라''' 방어 위주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제국으로 바꾸느라'''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한 감이 있다. 실제로 아테네는 이 전쟁을 통해 '''깡패로 성장했다.''' 일단은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성의 왼쪽에 조금 큰 균열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의 패배로 페르시아가 사분오열 됐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아테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쓴 《[[페르시아인들]]》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 일대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에게해-이오니아 일대만 영향을 끼쳤다면 모를까, 상당히 중요한 속주인 이집트 및 시리아 근방까지도 영향이 갔고, 덕분에 이집트는 페르시아 속주 중 가장 반항적인 속주로 존재하게 된다. 트라키아 일대의 속주는 유지가 어려운 시점까지 가기도 했고 이오니아에서 세금 거두라면서 지속적으로 갈굼받은 지역 총독들 입장에선 상당히 큰 문제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이 용병으로 페르시아 왕위다툼에 개입하기도 했고.[* 이 페르시아 내전에서 그리스 용병으로 참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로도 유명한 크세노폰이다. 그가 남긴 전쟁 회고록이 바로 아나바시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